[블랙잭] 피노코 언니 이야기

비셰 2022. 11. 5. 11:10

*조각글
피노코 언니와 기형낭종 시절의 피노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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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출구

 

 

 

그 명망 높은 문적의 외동딸이 바깥 걸음을 하지 않은 지는 오래되었다. 대대로 귀족의 혈통이 주지를 맡는 유서 깊은 사찰에서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주지 부부와 신도들의 기쁨은 한량이 없었다. 따님도 사람들의 기대에 한치 어긋남이 없이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상냥하여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았다. 그랬던 것이 열댓 살이 넘어가던 해에 갑자기 자취를 감춘 것이다. 걸어닫힌 안채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문이었으나, 달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도 그녀를 직접 만났다는 사람은 볼 수가 없었다.

 

죽을 병이 들었다던데.

사고로 남들 앞에 내놓을 수 없을 만큼 추한 몰골이 되었더래.

가출을 했다가 얼마 전에야 겨우 돌아왔다는구만.

 

주지가 홑몸이 아닌 딸의 머리를 손수 밀어 안채에 가둬놓았다거나, 이미 몰래 몸을 풀고 갓난애는 고아로 꾸며 사찰에서 거뒀다거나, 멀리 도망쳐서 아직껏 부모도 행방을 모른다는 따위 말들이 알음알음 오갔다. 하지만 안채에는 그보다도 믿기지 않는 일, 불온할 정도로 기묘한 비밀이 감춰져 있는지 모른다는 것을 사람들은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실은 귀신이 들렸다지. 독경을 해도 부적을 써도 효험이 없어서, 주지스님께서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부처님도 알아보지 못할 꼴이 된 딸을 몸소 안채에 묶어두셨다나. 지금도 밤이면 안채에서 그 따님이 혼자 떠드는 소리가 들린대.

 

이제 막 동자승 티를 벗은 앳된 승려는 안뜰 출입을 허락받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주지가 남들 모르게 그를 불러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안채에는 들어갈 생각도 말고 들여다볼 생각도 말라, 아니 아예 가까이 갈 생각을 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을 때도 겉으로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면서 속으로는 오히려 들떠했다.

 

'저렇게 엄포를 놓는 걸 보면 소문이 정말인가 보지. 내가 이 절에 들어오기도 전에 따님은 이미 모습을 감췄단 말이야. 어떻게든 한 번만이라도 얼굴을 봤으면 좋겠군.'

 

혹자는 안채의 여자를 본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더불어 귀신이 들린다고도 했으나 그런 엄포도 사내아이의 철모르는 호기심을 이기지는 못했다. 승려는 기회만 있으면 심부름 핑계를 대 안뜰을 오갔다. 그러나 사람 그림자도 보지 못한지가 얼마였을까.

 

해거름이 이르게 온 가을 밤이었다. 사위는 어둑하여, 소슬한 바람이 주지의 밤 시중을 마치고 돌아오던 승려의 파랗게 깎은 머리를 스쳤다. 돌연 한기가 들어 승려는 몸을 떨었다. 그때였다. 정원의 소로를 따라 나지막이 늘어선 은매화 나무 곁으로 사락사락 천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승려는 급히 수풀 뒤로 몸을 숨겼다. 안채의 귀퉁이를 돌며 여인의 그림자가 길게 뻗었다.

 

어스름 속에서 귀신처럼 반드럽게 굳은 새하얀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승려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그대로 뒤로 넘어질 뻔했다. 그러나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고 보니 그것은 노(能)의 여자 가면을 쓴 여인이었다. 비단 옷 아래로 배가 둥글게 부풀어 있었다. 승려는 냉큼 생각했다.

 

'과연, 주지의 딸은 문란한 여자였군.'

 

괴괴하도록 무표정한 여자 가면은 달빛 아래서 파리하니 슬픈 낯빛을 띠고 있는 듯 보였다. 발을 끄는 듯이 느린 여자의 걸음걸이 또한 어딘가 쓸쓸하게 느껴졌다. 정원에 먹먹하게 내려앉은 비감에 승려조차 서글픈 마음이 들려던 찰나였다.

 

"괴물 같으니, 그렇게 죽고 싶으면 왜 살아 있어?"

 

표독스러운 목소리가 찬 밤 공기를 쨍하게 갈랐다. 승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관목 뒤로 한층 몸을 움츠려 숨었다. 그러나 여자는 그를 향해 외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여자 스스로 목소리를 낸 것조차 아닌 듯했다. 여자는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발걸음을 멈추더니 가까스로 나무에 몸을 기대고 와락 외쳤다.

 

"그만 해, 입 좀 다물란 말이야!"

"바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머저리, 넌 평생 여기서 썩어야 해!"

 

한 순간 승려는 핏줄기가 오싹하니 얼어붙는 듯했다. 말하고 대답하는 두 목소리가 꼭 같은 여자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주지의 딸은 미친 것일까? 정말 악령이 씐 것일까?'

 

여자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동시에 밤하늘을 찢을 듯이 깔깔거리는 높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뒤얽힌 뱀 두 마리가 서로의 머리를 삼키려 무섭게 꿈틀거리는 것처럼 서로를 미워하는 두 개의 같은 목소리가 한데 뒤엉켰다. 승려는 공포와 경악에 사로잡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도 가면을 쓴 여자에게서 홀린 듯 눈을 떼지 못했다.

 

별안간 울음소리도 웃음소리도 뚝 그쳤다. 여자 가면이 승려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뭘 훔쳐보고 있어? 염탐꾼 같으니!"

 

사나운 목소리와 함께 눈이 번쩍하더니 뒤통수에 심한 통증이 일었다. 알 수 없는 힘이 승려를 휘어잡아 나무에 강하게 내동댕이쳤던 것이다. 머리에 손을 대 보자 끈적끈적 피가 묻어났다.

 

"으, 으아악! 귀신이다! 괴물이다!"

 

승려는 뒤늦게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해서 도망쳐 버렸다. 그날 밤부터 그는 비슬비슬 앓기 시작하여,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다가 결국은 달아나듯 사찰을 떠나고 말았다고들 했다. 그 뒤의 일은 알 길이 없다.

 

*

 

여자는 안채의 깊은 방으로 달려들어와 쓰러지듯 반상에 엎드렸다. 어깨를 들먹이며 한참을 울었다. 그녀의 배는 둥그렇게 불러 있었다. 배 속에 있는 것이 차라리 아기였다면 그녀는 열 달이면 이 저주스러운 괴물과 떨어질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녀가 배고 있는 것은 귀신, 요괴, 태어나지 못한 채 그녀와 똑같은 목소리를 가진 그녀의 쌍둥이였다.

 

'그것'은 기형의 낭종이었다. 태어나지 못한 쌍둥이가 그녀의 몸에 들러붙은 채 자라났다. 점차 몸집을 불려가던 '그것'은 어느 날 그녀의 내부에서 눈을 뜨고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너무해, 같은 배 속에 있었는데 왜 너만 걷고 말할 수 있는 거야? 왜 너만 태어난 거야?"

 

종양을 떼어내려는 시도는 수없이 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보고 말하는 것은 물론이오 강한 염력을 써서 건장한 성인 남성 여럿도 꼼짝 못 하게 할 수가 있었다. 수술을 하려 할 때마다 '그것'은 의사들을 미쳐 날뛰게 했다. 억지로 강행하려다가는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머리를 으스러뜨리는 통증에 기절하기가 십상이었다. 결국은 누구도 그녀의 수술을 맡지 않게 되었다.

 

종양이 점점 커져 배가 불러오자 부모는 그녀를 숫제 남들의 눈에서 숨겨버렸다.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이라곤 어린 시절 가문 간의 약속으로 맺어진 약혼자가 전부였다. 제대로 만나지 못한지도 오래되었지만 깊은 고독감 탓에 그녀는 약혼자가 가느다란 붉은 실처럼 보내오는 몇 통의 편지만으로도 연모의 정에 휩싸이곤 했다.

 

사랑하는 당신, 잘 계신가요. 오늘도 저는 상사의 열로 번민하고 있습니다……

 

"번민이 뭐야?"

 

종양의 목소리는 때로 징그러우리만치 천진하게 울렸다. 그럴 때면 '그것'이 살아있다는 것이 의식되어 한층 소름이 돋았다.

 

"시끄러워, 날 좀 혼자 내버려 둬!"

 

그녀는 충동적으로 펜을 쳐들어 자신의 배를 내려찍으려 했다. 그러나 펜은 살갗에 닿지도 못하고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허공에 멈추었다. 강한 충격이 그녀의 손을 때렸다. 손에서 튕겨나간 펜이 바닥을 굴렀다.

 

"미워, 너 따윈 죽어버려!"

 

뱃속이 꿈틀거린다. 그녀의 내부에서 증오가 출렁이며 차오른다. 그러나 그 증오는 누구의 것일까. 증오에 있어서만은 '그것'과 그녀는 정말로 한몸이었는지 모른다. 자신의 운명을 저주한 나머지 그녀는 몇 번의 자진을 시도했다. '그것'은 그녀를 그토록 증오하면서도 그녀가 죽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목을 매면 대들보를 부러뜨리고 창 밖으로 뛰어내리면 붙잡아 풀섶 위로 내던졌다. 그러고는 사납게 그녀를 조롱했다.

 

"살인자, 겁쟁이! 네가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넌 죽지도 못해!"

 

배를 찌르는 격통에 그녀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웅크렸다. 낭종은 너무 커진 나머지 이제 그녀의 목숨까지도 위협하고 있었다. 비명 소리를 들은 유모가 달려왔다. 그녀는 힘겹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카니, 카니 선생을 불러 줘요……."

 

*

 

그녀는 끈적거리는 점액에 잠겨 있었다. 몸 밖에서 두런거리는 여러 개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는 위험합니다, 나리. 아가씨의 몸이 버티지 못해요. 이대로면 오늘 밤을 못 넘길 겁니다."

"하지만 수술만 하려고 하면 누구든 미쳐서 난동을 부리니……."

"저주, 저주입니다!"

"카니 선생, 정말 방법이 없겠나?"

 

잠깐 말이 멈췄다. 그녀는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카니 박사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실은 블랙 잭이라는 의사가 있습니다. 어떤 수술이든 해내는 천재지만 무면허인데다 수술 한 번에 무지막지한 수술비를 요구하는 건달이라서 우리 의사들 사이에서는 내놓은 인간이지요. 그래도 실력만은 세계 최고입니다. 그 자라면 방법이 있을지도……."

"블랙 잭이라뇨, 박사님!"

"그 자는 천하의 악당이에요!"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아. 카니 선생, 우리 아이를 부탁하네."

 

의사는 싫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의사들은 언제나 그녀를 죽이려 들었다. 하지만 블랙 잭이라는 의사가 정말 무슨 수술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혹시…….

 

*

 

당신은 어떤 수술이든 할 수 있는 훌륭한 의사지? 그러니 날 살릴 수도 있을 거야.

 

*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초점이 맞아본 적 없는 눈이 한참을 흔들렸다. 흰색, 검은색, 붉은 색, 색깔들이 어지럽게 일렁거렸다. 이윽고 천천히, 첫 번째의 상이 그녀의 눈망울에 맺혔다. 수술 등의 찌르는 듯한 빛 속에서, 수술복을 입은 남자가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세계'였다.

 

 

 

 

fin.

 


피노코가 태어나기까지의 이야기

기형낭종편 보면 피노코가 평소에 언니나 의사들한테 말을 했던 거 같진 않은데(걍 염력으로 미쳐 날뛰게 했을 뿐) 낭종 피노코의 목소리가 언니 목소리랑 똑같았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이런 그림이 됐네요

하지만 별로 파들어갈만한 소재는 아니었네...이제까지 보고싶다면서도 굳이 안쓴데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